#7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는 문과대 04 이지혁입니다."

"예. 저는 음대 01 오선율이에요."

어색한 대화 속에서 선율의 대답은 왠지 성의 없다. 지혁은 첫 소개팅이라 들떠서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선율의 간결한 대답에 힘이 빠져 이내 조용해진다. 그 때 지혁의 핸드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준서냐?"

테이블 만 바라보던 선율이 시선을 고정한 채 순간 눈을 부릅뜬다.

"응. 소개팅 중이야. 하하. 응? 어디라고? 요 앞이네? 어제 수업 때 너 주려고 받은 프린트나 잠깐 받고 갈래? 그래 잠깐 들어왔다 가. 오케이."

선율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방금 전엔 흘려들었지만 문과대 04라면 아마도 맞을 것이다.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준서가 들어온다. 선율은 벌떡 일어선다. 준서도 놀라서 그대로 서있다. 짧지만 그들에겐 긴 시간이 흐른다.

"죄송해요. 저 가볼게요."

선율이 그대로 나가고 준서가 따라나선다. 지혁은 영문도 모른 채 혼자가 된 테이블에 그대로 앉아 있다. 밖으로 나간 선율과 준서는 말없이 거리를 걷고 있다.

"저기 앉을까?"

준서가 놀이터의 의자를 가리킨다. 선율이 말없이 의자에 앉고 준서도 따라 앉는다.

"왜 그냥 나왔어?"

"아니, 그냥……. 준서야."

"응?"

"……아니야."

다시 정적. 어색함 속에서 준서가 말을 꺼낸다.

"지혁이 어때?"

"몰라. 관심 없었어. 소개팅에. 친구가 자꾸……. 아니, 뭐. 꼭 그랬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별 생각 없어."

"음. 그 녀석은……. 맞아. 오락밖에 모르는 애야. 하하."

"……."

"참. 이거."

준서가 어제 산 귀걸이를 꺼낸다. 그는 어제 초휘와 만난 후에 이대 거리를 홀로 걸었었다. 처음엔 초휘에게 미안한 마음에 가방을 사려 했다가 원하는 것도 모르는 상태라서 그저 돌아다녔다. 결국 선율에게 줄 링 귀걸이를 하나 산 것이다.

"이게 뭐야?"

"그냥 어울릴 것 같아서."

"왜 나에게……."

"한 번 해봐."

"고마워. 준서야."

"진짜 잘 어울린다. 내가 안목이 좀 있거든."

"후훗. 준서야. 이번 주말에 한번 볼래?"

"그러자."

"집에 갈 거지? 나 좀 데려다주라."

"오케이! 가자."

퇴근시간이 임박한지라 지하철에 사람이 많았다. 자연히 둘 사이는 점점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둘 사이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대화가 줄어든다. 서로의 눈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애매한 벽면광고만 쳐다보고 있다. 선율은 문득 준서의 손을 쳐다본다. 자기도 모르게 그 손이 자기 손을 잡는 상상을 하며 자신의 왼손을 말아 쥔다. 그러더니 오른손으로 그 손을 잡는다. 그 찰나 지하철이 급출발하고 선율의 몸이 준서에게로 쏠린다. 순간 선율이 넘어지지 않도록 어깨를 잡았다가 멋쩍어 손을 뗀다.

"고마워."

"이 아저씨 운전 되게 못한다. 그치?"

"응. 안되겠다. 네가 좀 해라."

"하핫. 여긴 맨 뒤 칸이라 가기가 좀 힘들 것 같은데."

"그럼 뒤로 가서 밀면 되지. 히힛."

그 때 마침 준서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일어나서 자리가 생기자 바로 선율을 앉힌다. 선율은 고마워하며 준서의 가방을 받아든다. 준서는 선율의 뜻밖의 행동에 놀란다. 초휘는 한 번도 가방을 받아들기는커녕 고마워한 적도 없었던 것이다. 선율도 계속되는 준서의 신사적인 행동에 놀라고 있는 건 마찬가지이다. 선율이 의자에 앉자, 바로 앞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준서는 옆에 있을 땐 몰랐던 향기를 맡게 된다. 그것은 초휘처럼 진한 향수냄새가 아닌 선율의 은은한 샴푸냄새였다. 준서는 선율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낸다.

#8

아까부터 햇살이 따갑다. 준서가 머리를 감싸 쥐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아, 머리야. 얼마나 잔거지."

전날 친구들과 술을 과하게 마신 탓으로 쓰린 속을 거머쥐고 냉장고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물을 마신 뒤 속을 달래기 위해 해장라면을 끓인다. 보글보글 끓는 물을 보며 자신의 쓰린 속을 연상한다. 그리고는 천천히 어젯밤의 기억을 되짚는다. 신촌에서 술을 마시고 그의 친구들과 택시를 탄 것 까지는 생각이 난다. 그 뒤로 어떻게 내 침대에 있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시계를 보니 11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라면을 먹으며 그 국물에 감탄한다. 한 차례 트림을 하고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다. 그리고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어젯밤에 못 한 샤워를 한다. 이제야 사람이 된 것 같다. 의자에 앉아 컴퓨터 전원버튼을 눌러 킨다. 부팅이 되는 동안 핸드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한다.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2개 있다.

'준서야. 전화 안받네? 술 많이 마셔? 집에 들어가면서 전화해줘 - 선율 - 9/11 00:28'

'모처럼 전화했는데 안받는다 이거지? 보는 대로 전화해! - 초휘 - 9/11 00:28'

신기하게도 같은 시간 비슷한 내용으로 선율과 초휘에게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모니터를 보고 엔터 키를 눌러 윈도우 로그온을 시키고 다시 핸드폰을 잡아 전화를 하려한다. 그러나 준서는 어디에도 전화를 하지 못한다. 얼굴을 찡그리며 그저 손에 들고 있을 뿐.

"아! 진짜! 누구한테 먼저 하지……."

준서는 그저 누구한테 먼저 전화하는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있다. 그 사이 메신저에 로그인 되었고 두 개의 메시지가 창에 뜬다.

'현준서!'

'현준서!'

또 선율과 초휘이다. 준서는 초휘에게 대답하려다 지우고 다시 선율에게 대답하려다가 지우는 일을 반복하다가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로그아웃해 버린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든 채로 침대로 몸을 던진다. 다시 문자메시지를 보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무한테나 먼저 하면 어때!"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갑자기 고개를 파묻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왜 답이 안나오지……?"

베개가 촉촉해진다. 그 때 전화벨이 울린다. 준서는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통화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는다.

"……"

"준서야. 나야."

"어. 누나?"

"뭐? 누나라니? 누군지 알고 받은 것이야?"

선율이 아닌 초휘였다. 준서는 자신이 초휘를 선율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에 당황한다.

"응. 초휘야. 미안한데 머리아파서 이따 다시 전화할게."

"됐어. 끊어."

전화가 끊어진지도 모르고 베개를 적시며 핸드폰을 들고 있다.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왜? 끊으라며."

"준서야?"

"선율누나."

이번엔 초휘가 아닌 선율이었다. 준서는 이제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한다.

"준서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준서는 이제 대답하기도 힘들 정도로 흐느낀다. 정적 속에 흐느낌만이 흐른다. 그 상태로 1분정도 지났을까. 전화기 저 편에서도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선율과 준서는 서로의 알 수 없는 흐느낌에 자극받아 더 크게 울어버린다. 그렇게 약 1분간을 더 울었다.

"이제 괜찮아. 고마워."

"바보. 울다가 웃냐?"

"뭐 나만 울었나?"

"응. 난 안 울었다. 우리 울보 울길래 우는 척만 했지."

"또 무슨 울보야. 한 번이다. 한 번."

"못 봐서 모르지요. 많이 울었을지 어찌 알겠어."

"칫. 너무해."

"준서야."

"응?"

"아니 그냥. 호호."

"만나자."

"응?"

"만나자고요. 오늘 약속 있어?"

"아니. 그럼 몇 시에?"

"2 시쯤?"

"그래 이따 보자."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갈팡질팡했던 준서의 마음이 확고해진 순간이었다. 같이 슬퍼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위안이 된다는 것을 이전엔 알지 못했다. 준서의 마음속에 같은 크기로 자리했던 두 사람이 이제 그 차이가 확연해지고 있다.

2005/04/21 - [연필상자] - [연재] Message #1~4
2005/04/21 - [연필상자] - [연재] Message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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