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준서가 눈을 번쩍 뜬다. 그러나 입만 연 채 말을 하지 못 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할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선율도 친절히 준서가 말을 꺼낼 수 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려준다. 드디어 준서가 목소리를 낸다.

"받았네."

"응."

"무슨……일 있었어?"

"그냥. 좀 아팠어?"

"아팠어? 좀 괜찮아?"

"응 이제 거의 괜찮아."

"그거도 모르고……. 계속 전화했네."

"……."

"우리 내일 만난지 딱 1주년 되는 날이야. 맛있는 거 사줄까? 뭐 먹고 싶어?"

"그런 거 안 해도 돼."

"……."

"……."

"나… 연락하지 말까?"

"그랬으면 좋겠어."

"응. 잘 있어."

"……끊을게."

준서는 이미 끊어진 전화임에도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 하고 계속 귀에 대고 있다. 지금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괴로움은 이틀 전이 최고조였다. 그 날 머릿속에서 이미 헤어짐을 이미지트레이닝하여 극도의 괴로움을 맛 본 뒤였다. 공허함. 지금의 감정이 공허함이 가장 맞는 표현인 것 같다.

그는 말없이 핸드폰 화면에 등록된 그들의 사진을 지운다. 액정 위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그런 중에도 준서는 선율이 걱정된다. 확실한 이유는 모르지만 원치 않는 헤어짐으로 생각되고 마음약한 그녀는 자신보다 더 힘들어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그녀가 덜 아파할 방법을 생각해 본다. 준서는 이런 자신이 바보 같다 여기지 않는다.

결국 준서가 내린 결론은 증오를 통한 잊혀짐이다. 아쉬움의 이별은 후유증이 오래가지만 증오로 인한 이별이라면 아픔은 그 강도와 기간이 덜 할 거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작전을 눈치 채지 못하는 선에서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 계획을 세운다. 자신의 감정이 극한 고통을 벗어나 아무감정도 없는 상태임을 인지하고 차가운 미소를 흘린다. 정말로 감정 장치가 고장 나버린 것만 같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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