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선언을 충실히 따르는 분석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헤겔을 비롯한 독일의 형이상학자들이 반미치광이로 보일 것이다. 실제로 카르납과 같은 학자들은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가 '있음'과 '없음' 따위에 대해 논하는 것에 대해 '말장난이나 늘어놓는 사기꾼'이라고 공격했다.

그리고 하이데거류의 철학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니니 '예술'의 영역에 가서 헛소리를 늘어놓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라'는 말이 '벙어리가 되자'는 말이 아닌 다음에야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뜻이 되는데, 도대체 인간의 말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구분한다는 말인가? 물론 그들은 대답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이란 '논리적으로 분석가능하고 증명 가능한 것'이라고... 결국 그들은 철학을 엄밀하게 하자는 주장과 함께 철학을 폐기 통보한다. 그들에 따르자면 철학은 더 이상 '철학'이란 이름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된다. 형이상학을 예술의 영역으로 쫓아내는 순간 그들 스스로 도 수학이나 과학의 영역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이다. 오늘날 철학은 사실상 옛 주인의 흔적만 남은 흉가와도 같은 모습으로 텅 빈 채로 남아있다.



이처럼 철학의 존재의미조차 의심스러워진 이 시대에 예술철학이 철학을 구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찾게 되는 이유는 예술이 갖는 '말할 수 없음'의 성질에 있다. '음악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라'는 격언에 정면 배치된다. 저기 울리는 저 소리들을 어떻게 말로 설명한다는 것인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리라. 진동수나 음향학적 파장을 관찰하고 연주시간 - 예를 들어 CD러닝타임을 비교분석하는 방법을 우리 고음연에서 여러 회원들이 즐겨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전혀 무가치한 것은 아니겠지만 무가치에 가까운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예컨대, 바흐의 샤콘느 기타버젼을 야마시타가 연주한 것이나 로메로가 연주한 것이나 총연주 시간은 거의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이 곡을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비슷하게라도 해석한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대충 크게 보아도,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 샤콘느의 첫 번째 단조 부분을 야마시타는 '번개불에 콩볶아 먹듯이' 빠르게 연주하다가는 두 번째 장조 부분에서는 지루하다 싶을 만큼 천천히 연주하다가 세 번째 단조 부분에 와서는 또 다시 변덕을 부리며 광적인 스피드로 연주한다. 결과적으로 야마시타는 로메로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연주한 부분은 '느리게' 연주하고 로메로가 '(상대적으로) 느리게' 연주하는 부분은 '빠르게' 연주하는 정반대의 해석을 하면서도 연주시간은 동일하게 기록된 것이다.


기타 애호가들은 익히 알겠지만 그들의 탄현법과 소리의 질이 얼마나 다를 지는 언급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결국 CD의 러닝타임을 바라보며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 연주가 카라연의 것보다 '빠르다'느니 '느리다'느니 하는 것이 사소한 정보 이상으로 기능할 경우에는 아주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되고만다 - 을 기록하는 식의 방법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게된다'는 것인가? 그러한 과학적.음악학적 조사가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감성적 판타지의 단 1퍼센트라도 설명할 수 있을까? 감성적 판단의 여러국면들을 지성적 판단으로 마구 번역해서 논리적으로 검증해보고자 하는 분석미학의 시도가 '예술정의 불가론 - 로게님의 '현대 영미 미학의 전개모습'이라는 제목의 글을 참조할 것! - '이라는 처참한 자기고백 - 딕키의 '예술제도론' 역시 이러한 고백의 연장선상에 있다 - 에 도달하는 과정은 철학사의 도정에 있어서의 필연성을 수반한 과정이다.


'예술정의 불가론'은 비약해서 말하자면 모더니티의 첨단에서 더 이상 오를 곳을 찾지못하는 철학의 자기고백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던지는 순진하면서도 진리에 번뜩이는 말 한마디, "누가 정의하라고 했던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들도 정의할 수 없다. 엄밀한 개념과 증명가능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분석철학의 교리에 따르자면 형이상학만 침묵해야하는게 아니라 모든 철학이 침묵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세상의 어떤 사물도 정의될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조차도 받아들여 지지 않는 게 오늘날의 철학이 빠진 자기최면의 타락상황이다. 이런 철학으로 진리 - 인간이 만들어놓은 연역적 대전제로서의 진리가 아닌 사물의 참모습, 그 진실 - 에 접근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정의될 수 없다'는 진실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영역이 있으니 그것이 예술의 영역이다. 말러의 교향곡 제 6번을 정의한다는 말에 코 웃음 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정의한다는 말에 관심 기울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데까르트를 사제로하는 '확실한 지식'이라는 신앙에 경도된 무리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철학을 장악하기 이전까지 철학은 증명 가능한 '지식'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람직한 삶을 위한 '지혜'를 추구했을 뿐이다. 그러한 지혜는 세계와 내가 하나되는 조화로운 상태를 추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태생적 한계로 가지고 있는 주.객 분리의 사고 때문에 '조화'에 대한 우주론을 올바로 갖지 못한 것이 서양철학의 비극이지만 어찌됐건 그 비극의 조짐이 심화되기 이전에만 해도 파악할 수 없는 대상에 시지프스의 노동처럼 무망하게 접근해가는 것이 철학이었다.이제 원래의 철학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술철학에서만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철학에서 무언가를 '증명'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셸링에 의해 예견되었지만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증명 불가능성이라는 면에서 볼 때, 예술철학 가운데서도 음악철학이 타락한 철학의 역할을 되살리는데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잠재력과 가능성은 고음연의 여러 회원님들이, 위대한 음악, 때로는 오묘하고 사랑스럽기도 구슬 프기도한 음악들, 또는 실수를 거듭하지만 최선을 다한 아마추어의 연주에서 느끼는 그 '말 못할' 사랑의 감정이 '말없이' 설명해줄 것이다.


예술철학은 예술과도 같이 '말 못할' 것들에 대해 말로 설명하지만 '말을 넘어서' 대상에 다가서고자 하는 노력이며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철학 그 자체가 기울여야 할 노력에 다름 아니다. 카르납이 형이상학을 친절하게예술의 영역으로 옮겨주었을 때 그는 본의 아니게 선견지명을 발휘한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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