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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노상자/하고 싶은 말

군대가 나에게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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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전역 직후 작성한 글이다. 왼쪽 사진은 연합 훈련 때 찍은 건데, 미군 베레모를 빌려 썼는데, 쓸 줄 몰라서 이상하게 썼다.]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공간은 어디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군대를 능가하는 공간은 없는 것 같다. 24년 중 2년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난생 처음 겪어보는 많은 사건들에 군 입대 이전의 강한 기억들은 그 순위가 차츰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린시절의 대부분의 기억은 혼자 논 기억이다. 그야말로 '나 홀로 집에'일 때가 많았던 어린 날, 미리부터 사색의 즐거움을 깨닫고 흄과 버클리와 비슷한 극단적 회의주의도 이미 그 가능성을 상상했었다. 혼자라서 외로워하기 보다 즐기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컴퓨터가 생기고부터는 나의 상상력이 창조물로 승화되어 간단한 작곡이나, 연재소설, 연재만화 등으로 탄생되었다. 인터넷을 통한 친구도 많아져 현실세계의 인간관계와 사이버 공간의 인간관계는 거의 대등한 수준이 되었다.

  그러던 중, 내 손에 입대영장이 쥐어졌다. 한 순간에 모든것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선임에게 잘 보여야 살아남는다는데 이미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손님에게 상냥하게 대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이력이 있는 내겐 정말 자신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난 입영열차에 탔다.

  훈련소엔 전국 각지의 수 많은 유형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전과자부터 유학파까지 정말 다양했다. 처음엔 훈련병끼리 분쟁이 생겨 싸우는 일도 목격했으나 퇴소할 땐 이미 모두가 전우가 되어 뜨거운 정을 느끼는 사이가 되었다. 단기간에 깊고 다양한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자대라는 곳은 달랐다. 이등병은 그야말로 '죄인'이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욕먹고, 해도 욕먹는 곳이 그 곳이었다. 한 번은 소원수리 사건으로 부대가 발칵 뒤집혔는데, 어쩌다가 내가 그 신고자로 오해를 받아 많은 선임들에게 굉장한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한 번도 겪지 못한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그렇다고 만인앞에 내가 아니노라고 해명할 수 있는 짬도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참는 것 뿐이었다.

  하지

만 언젠가부터 모두가 소중한 동료, 선 후임이 되었다. 군대라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은 결국 '인내'였던 것이다. 물론 위 사건은 극단적인 사례였지만 군생활 중 참아서 이득을 본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군대사회의 인간관계는 '인내'로부터 시작하여 완성되는 것이었다.

  비단 군대뿐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군대식 정서가 뿌리깊히 박혀있다. 일반 기업의 조직구조도 군대의 계급구조를 그대로 본 따서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2년간 군대라는 공간에서 '인내'를 비롯하여 몸으로 익혀온 많은 것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적응하기 쉽도록 만들어 주었다. 특히 혼자가 익숙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큰 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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