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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심리상자

「오래된 항아리(장정윤 교수)」와 현대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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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감상하는 관점은 끊임없이 변해왔다. 그 역사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그 폭을 넓혀왔다. 음악으로 치면 불협화음으로 치부되던 화음들이 협화음으로 인정받고 널리 사용되면서, 오히려 변화를 위해 불협화음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면서 형식상의 자유도가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음악을 주로 협화음의 범위가 좁은 클래식과, 협화음의 범위가 넓은데도 의도적으로 불협화음(Tension)을 사용하는 재즈로 구분한다. 그 외에 많은 아방가르드적 음악이 있고, 구체음악, 전자음악까지 가면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예술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음대 수업을 통해 현대음악의 하나인 전자음악을 접하면서 들었던 생각들, 즉 기술적 측면이 강화되었으며 표현의 자유도는 매우 높지만 청중과의 교감을 찾는 것은 어려워졌다는 점은 이른바 모던아트에서 찾을 수 있는 특징이 아닐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던아트는 그 안에서 다각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예술가의 의도와 감상자의 해석의 일치는 서로에게 큰 희열을 안겨줄 것이다.

애석하게도 현대무용에 대해서는 아직 접해본 적이 없었다. 다행이도 좋은 기회가 생겨 동아대 무용과 장정윤 교수의 「오래된 항아리」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무용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었으므로 막연하게 현대음악에 대한 느낌을 최소한의 선 이해로 가진 채 감상에 임하였다. 또한 현대무용을 접한 경험이 없었기에,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 내용과 의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편하게 감상하였다.

처음으로 본 것은 북에 자신을 내맡기는 여인이었다. 그 안에서, 당당하게 북을 두드리다가도 고뇌하는 듯 조심스러운 몸짓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절제된 북소리를, 한국적인 정서를 교감하자는 신호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세 무용수의 춤은 곡선적인 흐름을 전달하며 여성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곧 승무가 이어졌다. 북과 승무를 통해 우리가 교감할 정서의 범위가 좀 더 명확해졌다. 그것은 불교적인 몸짓이었다. 번민과 인내, 그리고 해탈을 향한 춤사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여성적인 움직임이었다. 약하지만 강한 존재, 바로 어머니였다. 가녀리면서 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이내 장삼을 휘날리며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 전형적인 우리나라 어머니의 모습이 아닌가!

북소리의 연장선상인 듯한, 타악기의 리듬에 순응하는 것 같다가도 간간히 그 절제를 깨기도 하며 다양한 춤사위를 보여주었다. 특히 처음에는 관객과 가장 먼 무대 뒤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관객과 가까운 무대 앞쪽으로 나오기도 하며 무대를 넓게 사용하여 정열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그 표현은 오성으로 감지할 수 없는 리듬이 있어 나의 전신을 흔드는 것을 보아 미리 짜인 각본대로라기 보다, 장정윤 교수가 느끼는 그대로를 리듬에 맡겨 표출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 강했다.

다시 조명이 어두워진 후, 무대 왼쪽에서 굵은 실타래가 던져졌다. 그리고는 어려운 걸음을 하는 듯한, 무용수 두 명이 나왔다. 오른쪽에서는 검고 둥근 물체, 즉 이 무용의 주제인 오래된 항아리를 든 여인이 나왔다. 풀어진 실타래 위에서 바람에 날려가듯 쓰려지다가 다시 일어서 조심스러운 걸음을 하면서도 그 진행 방향은 실타래를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와 동시에 항아리를 품은 여인은 그 위에 새처럼 앉아 있다가도 벗어나 보려 뛰어내리지만 항아리에 발목을 붙잡혀 다시 항아리를 품는 몸짓을 하였다.

그 옛날 한국의 어머니가, 시어머니의 명령에 물을 긷기도, 장을 담그기도 하며 일생의 운명을 같이하는 항아리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실타래도 마찬가지로 남편과 아이들의 찢어진 옷을 꿰매기도 하고 삯바느질을 하여 살림에 보태기도 하면서 여인의 일생을 동여매는 상징적인 매개물이다. 자신의 일생을 한탄하면서도 다시 그것들을 추스르는 어머니의 심정마냥, 무용수들도 고뇌하는 움직임을 마치고 다시 실타래를 팔에 감고 항아리를 품어 퇴장한다.

다시 장정윤 교수가 나왔다. 이번에는 새빨간 치마를 두르고 있다. 우리는 그녀가 다시 열정적인 춤사위로 마무리할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동안의 만감을 해소하려는 듯 좀 더 자유로운 몸짓에, 다시 무형의 리듬을 형성하고 있었다. 보다 격양된 장단 속에, 북을 치고, 승무를 추던 모습이 겹쳐지며 무대가 가득 채워졌다. 항아리에 함께할 수밖에 없지만 그 안의 열정은 가득했노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은 움직임은 이미 예술적으로 승화되어 넓은 무대에 그림을 그리고, 선율을 자아내었다.

무엇보다도 이 무용은 장정윤 교수의 의도를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자신이, 가장 많은 부분에 참여함으로써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였고, 한국적인 소품과 장단, 의상을 활용하여 그야말로 한국적인 현대무용을 안겨주었다. 전체적으로 절제 속에서 세심한 동작과 열정적이면서 곡선적인 몸짓은 축적된 기술적 노하우 속에서 표현될 수 있는 극한을 보여주는 듯하였다. 공연을 보기 전 현대음악을 통해 가졌던 선이해가 현대무용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처음으로 감상한 현대무용이었지만, 앞으로도 기회를 찾아 현대무용을 감상하여야겠다는 욕구를 만들어 준 작품이 되었다.

박순영교수님의 해석학 수업의 일환으로 2007년 공연을 보고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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