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사랑받아야 하는 여자'는 총 3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1, 2편을 아직 못 보신 분들은 먼저 감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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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 강수애씨 맞지요?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그 남자는 차갑게 말한다. 본능적으로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강압적인 그의 분위기에 눌려 그러지 못 한다.

- 아 네. 제가 강수애 맞는데요...
- 저는 추기오 고객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러 온 사람입니다. 이 쪽지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받으세요.
- 아... 네.

쪽지를 건네주고 무거운 눈인사를 한 그 남자가 떠나갔다. 수애는 아직도 얼떨떨한 상황에 하얀 쪽지를 받아든 채, 그 남자의 뒷모습만 바라본다. 어떠한 질문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쪽지를 바라본다. 순간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삼청동의 수많은 사람들은 때 아닌 바람에 몸을 움츠렸지만 수애는 미동도 없다. 그제서야 천천히 쪽지를 펴본다. 수애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 뿐이다.

'이벤트야. 날 놀려주려고 이상한 이벤트를 하는거야. 나쁜남자.'

쪽지를 천천히 피던 수애가 한 글자를 발견한다.

'...녕'

마지막 글자가 '녕'인 단어는 많지 않다. 분명 '안녕'이라는 글자일 것이다. '안녕'이라는 말은 정말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이다. 웃으며, 또 울며 말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안녕이다. 우리나라는 이 '안녕'이라는 단어가 모든 상황의 인사에 사용할 수 있다. 차라리 많은 다른나라들처럼 만날 때 하는 인사와 헤어질 때 하는 인사가 다르다면 이 한 줄기 희망을 좀 더 일찍 버릴 수 있었다. 쪽지를 채 다 펴지 못했는데 숨이 턱 막혀온다. 드디어 모든 글자가 수애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수애씨. 당신은 좀 힘들 줄 알았어. 실망이네. 생각보다 쉬웠어. 안녕'

어떻게 봐도 수애가 이용당한 거다. 하지만 수애는 믿기지 않아 한 글자 한 글자 곱씹는다. 분명 다른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자기관리에 철저한 그녀이기에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쪽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그녀 주위를 지나가는 얄미운 커플들은 눈치를 보며 자신의 애인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다. 

10분 쯤 지난 것 같다. 이 글귀를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고 해도 수애가 버림 받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수애에게는 진심으로 마음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기오였는데,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남자도 진심으로 자신에게 사랑에 빠지게 만들 자신이 있었던 그녀였다. 다물어지지 않는 입술을 떨며 핸드폰을 꺼낸다.



- 말씀하신 재떨이 가져왔습니다.
- 아 네. 감사합니다.
- 누구... 기다리세요?
- 아무것도 아닙니다.
- 아 네.

기오는 창밖만을 응시한 채 카페 종업원에게 건조한 대답을 한다. 잠시 재떨이를 쳐다보고 담뱃재를 한 번 털면서 시선을 돌린 것이 전부이다. 이미 빈 커피잔을 자꾸 입에 갖다댄다. 창 밖에 조그맣게 보이는 수애는 생각보다 오래 그 자리에 서있었다. 

'지이이잉'

분명 핸드폰이 조용하게 울렸는데도, 기오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하얀 담뱃재가 자신의 바지에 떨어지는 것을 의식도 하지 못 하고 핸드폰을 바라본다. 그 곳에는 '강수애'라고 적혀있다. 기오는 전화기에 손을 가져갔다가 잠시 생각한 뒤 받지 않고 내버려둔다. 주위에서 힐끔 쳐다 볼 정도로 한참을 울리고 나서야 진동이 멈췄다. 그러나 이내 다시 전화가 왔다. 기오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전화를 받는다.

- 네.
- 네? 지금 '네'라는 대답이 나와요?
- ...
- 기오씨?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
- 직접 들려주지 못한 건 미안하네요. 전화로라도 듣고싶나요?
- 뭐라고요?
- 수애씨. 생각보다 쉬웠다고. 내 그리로 가서 제대로 망신주기 전에 돌아가는 것이 좋을거야.
- ...
- 다시 한 번 말해줄까? 당신 실망이야. 너무 쉬워.
- 추기오... 저주할거야.
- 그러던가.
- 진짜... 당신...
- 더 할 말 있어?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오는 전화가 꺼진 것을 알면서도 핸드폰을 귀에서 떼지 못 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수애가 완전이 사라질 때까지 숨 한 번 들여마시지 못 한다. 나쁜남자의 대명사가 되면서까지 이정도로 힘든 상황은 겪어보지 못했다. 정말 나쁜남자 추기오. 그 수식어가 지금까지 자신을 있게 한 수식어였는데, 이번만큼은 포기하고 싶었다. 심장이 심하게 뛴다. 원인 모를 공포증 환자처럼 불안해하던 그는 테이블 위에 만원 짜리 한 장을 올려놓고 밖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한다.

- 손님!
- 테이블에 커피값 있습니다.
- 손님! 잔돈은!

미친듯이 뛰어가던 기오가 두 명의 행인과 부딪히고서야 겨우 수애를 찾을 수 있었다. 

- 수애씨!

그녀가 돌아본다. 두 눈이 빨갛다. 하지만 그 눈빛은 어느 영화에서도, 어느 드라마에서도 본 적 없는 독기서린 눈빛이다. 마스카라 위로 번진 눈물이 어느 때보다도 진하다. 

- 당신... 온 힘을 다해 저주할거야...
- 수애씨 그게 아니라...

'찰싹'

기오의 눈이 번쩍였다. 정신을 차린 순간 그의 눈 앞에는 이미 수애가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며 수근거릴 뿐이다. 분명 뺨을 맞았는데 기오는 가슴을 움켜쥐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오의 발걸음이 무겁다. 

'분명 내가 원하던 결과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것이지... 분명 지금쯤이면 기력이 충만해 져 어느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정도의 컨디션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설마 날 미워하지 않은 것인가?'

힘겹게 현관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온 기오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비밀스러운 검은 상자를 여는 일이었다. 그 곳에는 칠흑보다 어두운 구슬이 놓여있었다. 어떠한 빛도 흡수할 생각이 없는 그 구슬은 강한 어두움을 뿜고 있었다. 구슬을 본 기오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기오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확실한 건 그렇게 어두운 구슬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쥐어짜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구슬을 꺼내 품에 안고 끅끅거리며 울고있는 알 수 없는 그의 행동만이 방 안을 메운다.


글 오렌지노 / 그림 Hwai

해당 글은 夢堂(몽당)에 동시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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