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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우주
서늘한 창공
대한민국 서울 연세대학교 언더우드상을 사이에 두고 한 쌍의 남녀가 등지고 있다. 둘 다 한참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갈등하다가 결국 선율의 손끝에서 먼저 통화버튼이 눌러졌다.
"띠리리리"
의외로 가까운 곳, 바로 뒤에서 소리가 나자 놀란 선율은 준서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에게 눈이 떨어지지 않은 채 벨이 울리고 있는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누른 준서와 눈이 마주쳤다. 설마 하는 생각에 핸드폰에 귀를 붙이고 소리를 집중하고 있는 선율이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다.
"언제부터 있었어?"
"20분 쯤 되었나? 왜 못 봤지?"
"그러게 바로 뒤에 있었을 줄이야……."
"근데 나 인줄 어떻게 알았어?"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네."
다시 한동안 서로를 바라본 채 어색한 웃음만이 흘러가고 그렇게 그들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학교식당의 스파게티를 먹으며 그 시끄러운 분위기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말이 없다. 그리고 자신의 머릿속에 상상했던 서로의 모습과 눈앞에 있는 그와 그녀를 비교하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신기하게도 그들이 식사를 마칠 때 까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봤으면서도 못 본체 하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준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선율의 그릇까지 챙기고 간만에 입을 열었다.
"여기서 파는 '마레'는 다른 스파게티 집보다 맛있는 거 같지 않아?"
"그래, 그래. 맞아. 나도 그래서 자주 먹는데……."
"정말? 그런데 왜 한 번도 못 봤을까?"
"그러게 말이야. 이상하네."
"수업 시작하기 전까지 조금 여유 있으니 밖의 벤치에서 좀 쉬다 들어가자."
그들이 서로를 알게 된 것은 정확히 일주일 전부터 이다. 선율은 여느 때처럼 즐겨하던 인터넷 고스톱을 하고 있었고 그날따라 좀 전부터 들어와서 같이 게임을 하던 사람에게 계속 돈을 잃고 있었다. 선율의 승부욕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온 정신을 집중한 한 판에 잠깐 사이 동안 그 사람에게 잃었던 금액의 두 배 이상을 따버렸다. 그러나 선율은 더 화가 났다. 아무리 봐도 이건 이 인간이 봐준 것이다. 지는 건 싫지만 봐줘서 이기는 건 더 참을 수 없이 분하다. 선율은 자기도 모르게 반말을 한다.
'일부러 졌지? 장난해?'
'내가 미쳤게? 지금 누구 놀려?'
'웃기네, 네가 고스톱 초보가 아닌 이상 그렇게 낼 리가 없었다.'
'그래, 나 어제 시작했다.'
한동안 말이 없다. 다음 판은 자동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무도 플레이를 하지 않아 시간제한으로 아무 패나 내지고 있는 것이다. 선율은 죽어도 미안하다고 할 수 없었다.
'난 서울 사는 01학번 대학생인데, 넌?'
'04.'
'어리구나.'
'늙었구나.'
'뭐? 이게……. 혹시 메신저 있냐?
시작은 엉뚱했지만 결국 그들은 메신저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친해졌고 그들이 같은 학교 학생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선율은 점심약속이 없는 날을 잡아 준서를 불러 밥을 사주겠노라 약속을 했고 준서는 여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고 약속장소인 언더우드상으로 나갔던 것이다.
#2
선율. 그녀는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인터넷상으로 친구는 많지만 왠지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제 와서 미팅도 해 보고 싶지만 더 이상 건수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 후회를 한다. 거절하지 말걸…… 왜 그랬을까. 새내기 시절 자신을 귀찮게 하던 미팅부탁. 그 당시 이별의 상처로 모두 거절했고 어느 순간부터 누구도 선율에게 미팅에 대한 얘기도 꺼내지 않았고 스스로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 상태가 너무 오래 갔다. 벌써 3학년. 휴학을 안 했다면 4학년이 되어있을 나이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만날 수도 없었다. 느낌이 오는 남자를 찾길 벌써 1년이 넘게 그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질 않는다. 가끔 친구 주선으로 소개팅이 들어왔지만 모두 아무느낌 없는 평범한 남자였다.
일주일 후 친구의 부탁으로 소개팅을 나가게 되어있으나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다. 아무 기대도, 아무 즐거움도 없는 그런 무료한 나날들이 그녀를 놔 주지 않고 있다. 전공인 작곡도 잘 되지 않는다. 큐피드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엔 그렇게 잘 떠오르던 악상도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작곡을 시도해도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선율은 지금 뛰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 수업시간이 촉박하게 남아 숨을 몰아쉬며 힐을 신은 채 어렵게 뛰고 있다.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난다. 재영이다.
"선유르!"
"뭐야, 창피하게"
"아, 미안. 히히, 오늘도 같이 지각인가?"
"웃겨. 나 먼저 뛰어간다. 이따 봐."
"거기 안서? 야! 같이 가!"
아슬아슬하게 전자출결 카드를 찍었다. 강의실 앞의 출석자 카운터가 1 올라갔다.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자 카운터가 다시 1 올라갔다.
"휴, 둘 다 살았네."
"나 아니었으면 넌 지각이었어."
"그런가? 헤헤."
그 날 전공 수업에선 다시 막중한 과제를 주었다. 그녀는 작곡이 좋아서 과를 선택했지만 가끔 후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모든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면서 오랜만에 콧노래를 부르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가락을 헤아린다. 생각보다 좋은 멜로디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이 악상을 평소처럼 잊지 않길 바랐다. 그 멜로디와 오랜만에 즐거운 현재의 기분을 함께 머릿속에 상기시키고 있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 안에서도 불쾌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선율은 요즘 인터넷고스톱을 즐겨한다. 가끔 가족들과 즐겨하던 놀이를 인터넷상의 모르는 사람과 거액의 사이버머니를 주고받는 사이 그녀에게 유일하다싶은 엔도르핀이 되고 있었다.
"오늘은 왠지 계속 따는 걸? 근데 이 사람 계속 잃어서 화나겠네. 후후."
갑자기 선율의 표정이 굳어진다. 같이 게임을 하던 사람이 나가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서부터 계속 줄어드는 자신의 사이버머니가 좋았던 기분을 무너뜨려버렸다. 게다가 막판에 이 사람이 봐준 것인지 그 돈 이상으로 따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감정의 변화가 별로 없던 나날과는 달리 오늘따라 즐거움과 짜증의 기복이 심한 듯하다. 그리고 다시 그 사람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기분이 좋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3
준서, 그는 편안한 휴식이 필요하다. 너무 많은 문제들을 안고 끙끙대고 있다. 늘 해오듯 시나 소설을 쓰며 자신을 달래보고 싶지만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2학기가 시작되었는데 벌써 과제점수도 좋지 않다. 버스노선이 바뀌어 등교 시 더 복잡하고 많이 걸어야 하는 것도 짜증이 난다.
그는 무엇보다 여자문제로 괴롭다. 자신에게 무책임한 여자친구를 복수하려는 심정으로 다른 여자를 2,3개월간 만나며 그녀를 보냈다. 그러나 다시 견디기 힘들어져 자존심을 버리고 이전 그녀에게 돌아갔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심히 고민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그녀의 2년 가까이 되는 유학기간을 포함하여 3년을 만나오며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공백 기간도 몇 번 가져보았다. 내가 정말 그녀를 필요로 하는지, 그렇게 항상 고민 속에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요즘 시작한 것은 인터넷 게임이다. 친구에게 포커나 고스톱을 배워 시작했으나 그다지 흥미를 느끼진 못 했다. 그러나 언젠가 흥미를 느끼리라 꾸준히 하고 있었다.
"둔서야!"
등굣길에 누군가 그를 부른다. 초영이였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
"히힛, 너 부르는 재미로 사는데?"
"뭐냐? 대체. 근데 오늘은 일찍 가는 것 같다?"
"응. 시계를 잘못 봐서 일찍 나왔지이-."
"그래, 그런 게 아니고서야 네가…….
"아 맞다. 오늘 우리 반 개강파티 있는 거 알지?"
"……생각 해 볼게."
"좀 나와라 좀!"
"……."
"데이트라도 있는 거야?"
"수업시간 얼마 안 남았다. 빨리 가자."
"치이."
그 날도 준서는 친한 친구 지혁이와 학관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그날따라 그 맛있던 '마레'도 별 맛이 느껴지지 않자 자신의 정신상태가 얼마나 어지러운지 알게 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그는 작은 일에서부터 즐거움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곧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여 평균 10분을 기다리던 버스가 바로 오는 것을 보게 되고 준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생긴다. 그러나 절대 오래가지 않는다. 우연히 자리가 나서 앉아 버릇처럼 핸드폰을 꺼내 시각을 확인한다. 다시 그의 입가에 미소가 퍼진다. 이유는 없었다. 즐거워서인지, 즐겁고 싶어서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컴퓨터를 켰다. 여자친구인 초휘도 메신저에 보이지 않는다. 오늘따라 그녀가 뭘 하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다. 뭘 할지 생각하다가 인터넷 고스톱을 켰다. 자동 참여로 들어간 방엔 사이버머니를 꽤 많이 보유한 유저가 있었다. 패가 좋은 것인지 조금씩, 조금씩 따고 있었다. 고스톱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고를 함부로 못 한 채 그렇게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준서의 눈이 커졌다. 한 판에 대부분의 사이버머니를 잃고 말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상대가 오히려 화를 낸다. 그러더니 자기소개를 하고 같은 학교 선배임을 알게 된다. 준서는 버스에서처럼 다시 입가에 미소가 퍼진다. 그러나 그는 전혀 그것을 알아채지 못 한다.
#4
준서와 인사를 하고 수업이 먼저 끝난 선율은 레코드점에 들러 청음용 음악을 한 곡 듣고 지하철을 탔다. 플랫폼에 도착하자마자 지하철이 도착했고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생긴다. 자리가 딱 한 곳 비어서 그 곳에 앉아 버릇처럼 핸드폰을 꺼내 시각을 확인한다. 다시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퍼진다. 역시 이유는 없었다. 얼마간 핸드폰을 더 만지작거리다가 준서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지이이잉'
주머니의 진동에 수업중인 준서가 핸드폰을 조심스레 꺼낸다. 그리고는 선율의 문자에 반가워하며 기분 좋게 수업을 듣는다.
'오늘 만나서 재밌었어. 근데 너 귀엽다~.'
머리에 수업 내용이 들어오지 않음을 인식한 그가 다시 핸드폰을 꺼내 답장을 보낸다.
'나도 재밌었어. 누나도 예뻐~ 후후.'
수업이 끝나는 시각은 평소 40분이었는데 그날따라 교수님이 3분을 넘겨서 끝냈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던 준서가 처음으로 이 일로 짜증을 낸다.
"좀 일찍 끝내주지……. 별 거 없으면서……."
"그러게. 근데 오늘따라 왜 그러냐? 평소엔 그런 말 안 하던 네가."
"내가 뭐. 야, 나 먼저 간다."
"왜? 비디오게임 한 판 해야지."
"됐다. 너나 많이 하여라."
비디오게임 방에 가자는 지혁을 따돌리고 서둘러 집으로 가는 준서의 발걸음이 가볍다. 선율에게 전화를 하려다, 다시 그만두기를 두세 번 반복하더니 체념한 표정으로 무거운 걸음과 함께 여자친구 초휘에게 전화를 건다.
"통화중이네."
집에 도착한 선율이 준서에게 전화를 시도했지만 통화중임에 실망하고 침대에 털썩 눕는다. 잠시 후 몸을 돌려 엎드린 뒤 핸드폰을 잡고 준서가 보낸 답장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며 생각한다.
'예쁘다는 말도 할 줄 아나? 의외네.'
기지개를 피며 손을 쭉 뻗자 커다란 하트쿠션이 손에 잡힌다. 그녀는 그 것을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며 오늘 일을 떠올린다. 왠지 즐거워진다. 처음엔 미소로 시작했으나 갈수록 웃음소리가 커진다. 곧 노래까지 부르며 쿠션을 다시 꼭 끌어안는다.
'띠리리링 띠링 띠리링'
"여보세요?"
"응, 나 준서야. 잘 들어갔어?"
"응. 그래, 그래. 넌?"
"거의 다 왔어, 교수가 어찌나 늦게 끝내주는지……."
"후훗. 그래?"
"응. 뭐하고 있었어?"
"그냥 쉬고 있었지. 노래들으면서."
"무슨 노래?"
"안 가르쳐줘."
"아, 예."
"히히. 메롱."
"앗, 나 집에 다 왔어 이제 끊을게."
"어, 응. 그래."
준서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메신저에 접속한다. 그리고 초휘를 차단한 뒤 선율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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