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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연재상자/단편선

귀신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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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을 본다.


나는 귀신을 본다. 아, 듣기도 한다. 그런데 만져지진 않는다. 이 빌어먹을 능력을 얻게 된 것은 5년 전,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 날부터이다.

집안이 넉넉하지 않았던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유치원이나 학원같은 걸 다녀본 적이 없었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덕에 라디오가 가장 친한 친구였다. 집 안에 있으면 늘 이면지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런 내가 가장 처음 사귄 학교 친구는 하얀 얼굴에 알이 두꺼운 안경을 낀 숙희라는 여자애였다. 어쩐지 웃음기가 없던 숙희는 사람을 빤히 보는 습관이 있었다. 처음엔 조금 거북했지만 예쁜 얼굴을 하고 나를 봐주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숙희는 내 그림을 좋아해주었다. 그래서 자신을 그려달라 떼를 썼다. 자신은 없었지만 혼신을 다해 그렸고, 형편없는 그림이었지만 그날 처음으로 숙희의 웃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숙희를 볼 수 없었다. 선생님 말로는 사고를 당해 오랫동안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날부터 학교는 쓸쓸한 분위기가 가득했고, 소문을 통해 들은 말로는 숙희가 유괴범에게 납치당한 뒤 행방불명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벌써 일주일 째 혼자가 된 하교길에 골목에 떨어진 한 종이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내가 그린 숙희가 있었다. 분명 내가 그린 것이 맞는데, 한가지 다른 것은 숙희의 하얀 스커트가 빨간색으로 변해있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라 그림을 보다가 날 부르는 숙희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빨갛게 젖은 스커트를 입은 숙희가 공중에 떠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소름이 돋았다. 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들었을 때, 난 안방에 누워있었고 엄마가 내 손을 꼭 붙잡고 내가 깨어난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옆집 아주머니가 기절한 날 발견하고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뛰어왔다고 한다. 애가 숨은 쉬고있고, 병원에 갈 형편이 아니어서 일단 집으로 왔는데 금방 깨어나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런데 방 안에는 한명이 더 있었다. 바로 붉은 옷을 입고 붉은 눈을 한 숙희. 날 한 번 쳐다보더니 창문을 통과해서 나가버렸다. 이번엔 비명을 지르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병실이었다. 엄마는 울고있었다. 난 내가 본 것들을 전부 말했다. 엄마와 의사의 표정이 굳었다. 그때부터 다정한 여자선생님의 상담이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이상하다는 것만 확실히 알게 되었고, 갈수록 더 많은 귀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한 것은 그 이후로 한 번도 숙희를 본 적은 없었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 하고 있었다. 교통사고로 죽은건지 끔찍한 형상의 귀신이 많았다. 그냥 이리저리 떠다니는데 한 번도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가끔 이상한 소리를 내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한 번은 눈이 마주쳐서 놀랐는데 나에게 다가오더니 멈칫한 나를 그대로 통과해 지나갔다. 아마도 눈을 마주친게 아니라 나를 못 봤던 것 같다. 아니, 귀신은 사람을 볼 수 없는것인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귀신에 대한 나름의 연구가 계속되었다. 나를 해치지 않는다면 굳이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것이라면, 좀 더 많고 또렷한 귀신들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그 많은 귀신들의 소리때문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다. 이미 학교에선 알게모르게 귀신을 보는 녀석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말을 거는 친구가 거의 없었고, 수업중 귀신이 보여 고개를 돌리면 선생님이 겁먹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곤 했기 때문이다. 친구가 없는 건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얼마전부터 내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 친구가 있었다. 그냥 호기심이 많은 녀석인 것 같았는데, 가위에 눌려 귀신을 봤다며 내가 본 귀신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본 귀신들을 그려서 보여줬는데 일부러 잔인한 모습만 그려줬기에 그 후로 말을 잘 걸지 않게 되었다.

그날도 집으로 가고 있는데 하얀 옷을 입은, 상당히 멀쩡해보이는 귀신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늘 보이던 귀신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 들어 쳐다보고 있는데 그 귀신이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서서히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단 한번도 귀신이 내게 이런 적이 없었기에 소름이 돋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귀신이 숙희라는 사실이었다. 5년동안 자랐는지, 얼굴도 약간 변해있고 키도 커져있었다. 공중에 떠다니지 않았으면 귀신이라고 생각하지 못 했을 정도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스스슥 소리를 내며 귀신이, 아니 숙희가 내게 다가왔다. 

"너 내가 보여?"
"어? 응... 너야말로 내가 보여?"

이 무슨 뚱딴지같은 대화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놀라움보다 반가움이 더 컸기에 어느새 숙희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되었다. 숙희에게 새로운 사실을 듣게 되었다.

"난 뭔가 다른 귀신이랑 다른 것 같아. 사람은 물론 모든 사물을 볼 수 있고, 그들의 소리도 들을 수 있어. 아주 가끔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데, 보통은 그냥 무시해. 근데 널 다시 볼 줄이야..."
"넌 그대로 자랐구나 신기하다. 이런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지만... 너 왜 죽은거야?"

갑자기 숙희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 그림 보면서 걸어가다가 납치를 당했어. 유괴범이 우리 부모님께 돈을 요구했는데 우리집엔 그만한 돈이 없었을거야... 아마 신고를 한 것 같은데 그놈이... 그 나쁜놈이!"

나는 갑자기 엄청난 한기를 느꼈다. 어떻게든 진정시키고 싶었다.

"미안해. 괜한 걸 물어봤구나."
"아니야. 5년동안 그놈을 찾아다니고 있지만 아직도 못 찾았어."
"찾으면 어떻게 할건데?"

그 때 갑자기 숙희가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난 훈련을 해서 사람을 만질 수 있어. 복수해야지."

다시 한 번 소름이 돋았다. 주위에서 이상한 시선이 느껴지자 더이상 대화를 멈추고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숙희에게 복화술 하듯 집으로 가자고 한 뒤 걸어갔다. 다시 인기척이 없다고 느껴지자 말문을 열었다.

"꼭 그놈을 잡았으면 좋겠다."
"나도 나지만, 너도 참 힘들게 살고 있구나."
"응? 무슨말이야?"
"너도 정상은 아니잖아. 아직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나에 대해서 모른다고? 내가?"
"너도 많이 봐왔겠지만, 이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귀신이 있어. 자신이 귀신이 되어 떠돌고 다니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귀신. 그리고 무덤에서 나오지 못 하고 머무르는 귀신. 나처럼 사람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귀신. 그리고..."

숙희가 잠시 고민한 뒤 천천히 말문을 연다.

"너처럼 자신이 죽은줄도 모르고 사람들 속에 섞여있는 귀신."


夢堂(몽당)에 동시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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